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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선교 위해 눈물로 복음의 씨앗을 심다-오요한 선교사(중국) 오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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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하다 추방되는 혹독한 시련 닥쳐 
성도들 이단 미혹되지 않도록 중보 요청


 


 중국 남부 A지역에서 사역 중인 오요한 선교사는 “중국에 기독교인이 8000∼1억 2000명 정도인데 가장 심각한 것이 이단 문제”라고 지적했다. 오 선교사는 “이단의 활동으로 많은 교인들이 믿음을 잃은 경우가 많다”며 “이들을 영적으로 무장시킬 수있는 것은 성령을 강조하는 순복음의 영성 뿐이며 특히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통해 중국 성도들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요한 선교사가 순복음의 영성을 심기 위해 중국 땅을 밟은 것은 지난 1995년. 하던 사업을 접고 40대의 늦은 나이에 신학을 공부한 그는 한세대 목회대학원 시절이었던 93년 중국으로 단기 선교를 다녀오며 중국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됐다. 한달 간의 선교활동은 그에게 선교 사역에 대한 많은 도전과 생각을 주었다.


 “당시 동북 3성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했는데 그 후 해마다 중국으로 선교를 다니며 비전을 구체화하기 시작했죠. 현지에서 사역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이 언어였기 때문에 95년 중국에 가서는 1년 반동안 언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했습니다”


 오요한 선교사가 중국 땅을 밟을 당시 그는 우리교회 선교사로 파송받지 않았다. 그 때 우리교회는 중국 선교가 어려워 정식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고 있었다. 사업으로 제법 돈을 모은 오 선교사는 자비량 선교사로 중국에 들어가 사역하다가 당시 선교국장이었던 김정철 목사의 연락을 받고 96년 8월 본교로 급히 들어왔다.


 “중국 선교에 대한 비전이 컸던 김정철 목사님은 ‘아무리 선교의 문이 열리지 않았더라도 나는 소명받은 자를 보내야겠다’고 말씀하시며 저를 정식 선교사로 파송받게 해주셨죠. 그해 9월 저는 조용기 목사님으로부터 정식 선교사로 임명받고 아내와 딸을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당시 학생 신분이었던 오 선교사는 ‘외국인은 기숙사에서만 생활할 수 있다’는 방침 때문에 선교활동에 적잖게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침 기숙사에 학생이 넘쳐나  오 선교사는 가족을 데리고 인근 지역에 거처를 마련했고 그 집을 성전삼아 비밀리에 가정교회를 만들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 때가 98년 6월이었다.


 그러나 오 선교사가 외국인의 신분으로 현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만날 사람들을 예비해주셨고, 그들을 통해 복음이 확산되도록 역사하셨다. 그 중 한 명이 한의사였다. 허리통증으로 한의원을 찾은 오 선교사는 치료를 받는 3개월동안 그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표정없는 반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 선교사가 한의사에게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당신이 어려워지면 외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말을 하자 그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예수님을 믿겠다”며 그 자리에서 개종을 결심한 것이었다. 그의 개종에는 오 선교사와 함께 치료를 받던 대학생 부부의 역할도 컸다. 그들은 한의사에게 “오 선생이 전하는 말이 진심인 것 같아 우리는 그를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가”라며 그도 개종할 것을 청했던 것이었다.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그들은 우선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기로 했고, 한의사는 자신의 한의원을 교회로 내놓았다. 수요 예배 장소로 사용되던 한의원은 대학생 부부의 형제들 그리고 한의원을 찾는 환자들로 그 수가 불어나기 시작해 주일에 한차례 더 모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먼 곳에서 오는 환자들의 요청으로 지역별로 교회가 세워져 오 선교사의 가정에 세워진 교회까지 5개의 교회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주일이면 다섯 지역을 돌며 설교를 해야 했던 오 선교사는 흩어져 있던 교회를 한 곳으로 모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성도 한 명이 현지인의 이름을 빌려 종교법인에 교회를 승인해달라고 신청하면 5~10년 뒤 승인을 받을 수 있다고 해 교회 연합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2000년 초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군사지역 지하벙커를 얻어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성전 마련비용은 철저하게 성도들의 헌신으로 이뤄졌다. 1원짜리 국수로만 끼니를 때우던 한의사가 100원의 헌금을 낸 것을 시작으로 어느 성도는 200원, 또 어느 성도는 3000원이라는 돈을 성전 마련에 써달라며 오 선교사에게 내밀었다. 그 밖의 성도들은 직접 철판과 목판으로 성전 의자를 만드는 등 모두들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루는 군부 장교가 찾아와 “비인준 받은 교회에 군인들이 참석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장 이 곳에서 나가달라”고 명령해 오 선교사와 교인들은 교회를 옮겨야 했지만 어디로 가야할 지 막막했다. 다행히 번화가에 있는 한 건물로 교회를 이전할 수 있었지만 4개월만에 또 다시 철수해야 하는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결국 성도들은 성전 집기를 한 성도의 빈 집으로 옮겨놓고 이전 가정 교회로 흩어져 다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해 8월 오 선교사가 거주하는 아파트에서 한국에서 단기 선교를 온 월드미션 팀과 성도 50명이 교제를 나누고 있던 중 공안 30명이 불시에 들어닥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연행해 갔다. 집회가 불법이라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외국인이 포함된 불법 집회라 A지역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베이징 본부까지 보고가 올라갔다. 연행된 이들은 한달 간 심문을 받으며 본부의 결단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곧 성도들에게는 무거운 벌금형이 처해지고 오 선교사는 추방당할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오 선교사는 성도들의 석방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다. 다행히 성도들은 벌금을 물지 않고 석방됐지만 이 일로 오 선교사는 중국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자식같은 성도들을 두고 그 땅을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 선교사는 눈물을 흘리며 동료 선교사에게 제자교회를 돌봐달라고 부탁하고는 정들었던 중국 땅을 나와야 했다. 그리고 5년간 사이판과 대만에서 선교사역을 잇다가 비자를 재발급 받고 지난해 9월, A지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동안 잃은 양도 있고 반면 새로 얻은 양도 많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지켜온 성도들에게 고맙습니다. 한편 시험이 들거나 이단으로 빠진 성도들을 보면 안타깝고 눈물이 납니다. 저는 이들이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기도를 쉬지 않겠습니다. 중국은 법적으로 보면 선교의 문이 닫힌 곳입니다. 하지만 복음으로 이미 열려 있는 땅입니다. 사역이 힘들어도 음지에서 활동하는 많은 선교사들과 성도들의 눈물어린 기도가 있어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중국의 가정교회들이 이단에 미혹되지 않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성장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또한 이를 위해 사명감을 갖고 나아가는 저와 사모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중보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진설명=중국은 법적으로 선교가 닫힌 나라다. 하지만 이미 복음으로 그 문이 열려 8000∼1억 2000명의 기독교인들이 존재한다. 이들을 위해 음지에서 수많은 선교사들이 목숨걸고 사역에 전념하고  있다. 또한 월드미션(사진)팀들이 해마다 중국으로 들어가 단기선교활동에 힘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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