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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 <특집>전명진 선교사 오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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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라니족 사역 위해 새벽길 가던 중 사고로 숨져
“선교는 하나님 주신 열정으로 하는 것” 늘 강조
현지 목회자 재교육 제자 양성에 누구보다 힘써
    


 남미 볼리비아에서 사역하던 전명진 선교사가 9일 오전 5시30분(현지시간) 선교지로 이동하던 중 차량 전복사고로 소천했다. 향년 57세. 전명진 선교사는 사고 당일 새벽 3시 볼리비아와 파라과이의 접경지대인 이소소지역 과라니족 사역을 위해 이동하던 중 타고 있던 차량의 타이어가 펑크나면서 현장에서 사망했다.
 1988년 볼리비아로 파송된 전 선교사는 아르헨티나를 거쳐 볼리비아에서 한인 및 현지인 목회자 재교육, 베데스다대·영산신학교·고아원 운영, 굿피플 어린이 사역 등을 펼쳐왔다. 2002년부터는 문맹과 기아에 허덕이는 과라니족을 돕기 위해 장학금 지원, 소득 증대 사업, 풍토병 퇴치 등 다양한 사역을 전개해왔다.

 전명진 선교사의 발인예배는 유족인 조순희 사모와 자녀, 신학생, 성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13일 볼리비아 산타크루스에서 드려졌다. 화장 후 전 선교사의 유골 일부는 그가 사랑했던 베데스다대 한 켠에 묻혔다.
 조순희 사모는 19일 새벽, 전 선교사의 유골을 안고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고, 20일 오전 베다니홀에서 우리교회 성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 선교사의 발인예배가 드려졌다. 전 선교사의 남은 유골은 크리스천 메모리얼파크에 안치됐다.





남미 선교 위해 살다간 주의 일꾼



 남미 선교활동에 전념했던 전명진 선교사가 남미와 인연을 맺은 건 10대 후반 파라과이로 이민을 떠나면서다. 이후 남미선교에 대한 비전을 받은 전 선교사는 1986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볼리비아로 들어갔다.
 볼리비아는 중남미 통틀어 제일 가난한 나라 다. 인디언들이 많고 대부분의 도시가 백두산 해발고도 이상의 높이에 위치했다. 전 선교사는 볼리비아에서 1년간 부교역자로 일한 뒤 아르헨티나로 이동했다. 1987년 12월 아르헨티나에서 남미순복음교회를 개척한 그는 88년 2월 여의도순복음교회로부터 정식으로 선교사 임명을 받았다. 7년간 사역하면서 3곳의 현지인교회를 세웠고, 아르헨티나 하나님의성회 신학교 분교도 설립하며 중남미 선교를 향한 비전을 구체화해나갔다. 그러던 중 선교국으로부터 “볼리비아로 이동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최인규 목사의 후임으로 2001년 볼리비아로 들어간 그는 60명이 재학 중인 순복음중남미총회 영산신학교와 50여 명이 출석하는 볼리비아순복음교회, 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도원을 맡았다. 2003년부터는 현지 목회자 재교육에 대한 소명을 받아 ‘현지인 목회자 수련회’를 시작했다. 올해로 10회를 맞은 수련회는 볼리비아 뿐 아니라 인근 페루, 에콰도르, 파라과이, 브라질에서도 목회자들이 참석해 매년 1000여 명의 목회자가 참여하는 명실상부 목회자 훈련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게 됐다. 

 전명진 선교사는 어린이집(고아원) 운영에도 힘써 주 정부의 인가를 받아 버림받은 아이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양육해 왔다. 남미 선교에 있어 큰 획을 그었던 사역은 베데스다대학 설립이었다. 최인규 목사 때부터 숙원이었던 대학설립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정부가 단과대인 신학대만의 설립을 허가해주지 않아 전 선교사는 4개과가 있는 대학 설립으로 계획을 바꿔 추진했다. 그래도 정부의 허가는 쉽지 않았고, 결국 4년 후인 2005년 9월 대학인가를 받게 됐다. 모두들 불가능이라 했지만 전 선교사는 오직 기도로 기적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시작은 했지만 더 넓은 캠퍼스와 건물 건축이 문제였다. 그때도 그는 조용히 하나님께 무릎을 끓었다. 선교대회 차 한국에 들어온 그는 생각지도 않게 조용기 목사로부터 선교비를 후원받았다. 그것이 씨앗이 돼 남미선교회로부터, 미국의 한 교회로부터, 독지가의 후원으로 2.7헥타르(약 28,100㎡) 캠퍼스 부지를 매입할 수 있었다. 그는 “선교 사역을 펼치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과 꿈, 비전, 열정이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고백했다.

 2002년 전명진 선교사는 과라니족 사역을 시작했다. 이소소라는 지역은 볼리비아와 파라과이가 100년 동안 전쟁을 했던 곳으로 전 선교사가 활동하는 산타크루스에서 동남쪽으로 약 400㎞ 떨어진 인디언 보호구역이다.
 그곳까지는 비포장도로로 비가 오면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는 오지였다. 이번 사고도 우기가 시작되기 전 과라니족을 돌아보기 위해 떠났다 당한 사고였다. 사역 초기 어렵게 들어간 그 곳에서 그는 통나무를 잘라 강대상을 만들고 나무 밑에서 예배를 드렸다. 3년뒤에는 성전과 숙소를 지어 사역을 했다. 물과 전기가 없는 과라니족의 삶의 개선을 위해서는 ‘이소소 새마을 사업’ 프로젝트도 시행했다. 과라니족에게 배움의 길을 주기 위해 학생 100명을 후원하는 등 아낌없는 지원에 나서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과라니족에 대한 애정을 갖고 사역에 전념했던 전 선교사는 2013년 12월 9일 새벽, 이소소지역으로 향하는 도중 불의의 사고로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남미선교사역의 한 획을 긋고 30여년 동안 쉼없이 달려온 그는 사랑하는 가족과 볼리비아순복음교회 성도들 그리고 베데스다대생, 영산신학생, 고아원생들의 눈물을 뒤로 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품에 잠들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선교행적은 그를 사랑했던 제자들과 동료, 성도들의 가슴에 또 하나의 사명감을 안겨줬다. 19일 오전 베다니홀에서 열린 발인예배는 순복음 사역자와 성도들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지켜봤다. 조용기 목사와 이영훈 목사 등 많은 조문객들은 조순희 사모와 전지혜, 사라레베카, 크리스티나, 안드레아에스더 네 딸을 위로하며 전 선교사가 남긴 발자취를 잊지 않겠다고 전했다.
 이날 발인예배에는 고인의 영정 사진 아래 삼녀 크리스티나가 아빠에게 남긴 크리스마스카드가 놓여 있어 조문객들의 눈시울을 더욱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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